역사 · 연혁

시대를 읽고 수요를 파악하여 기술 개발에 도전하고, 역사를 구축해 왔습니다.


다나까귀금속은 1885년 창업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발전과 함께 계속하여 성장하였으며, 기술력으로 세계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1885-1945년

창업 시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환전상으로 창업한 다나까귀금속은 일본의 공업화와 함께 귀금속의 공업 이용으로 방향을 전환하였습니다. 백금선 및 촉매용 백금망을 비롯하여 백금(플래티넘) 공업제품 등을 속속 개발하여 근대 일본의 공업화를 지탱하였습니다.
1885년

창업자인 다나까 우메키치는 도쿄의 에지마야라는 전당포에서의 수련을 거쳐 에지마야다나까상점을 개업하였습니다. 창업 지역인 도쿄 니혼바시구 기타지마초(현 주오구 니혼바시 가야바초)는 이후 2006년까지 나다까 귀금속 그룹의 본사 소재지였습니다.창업 당시의 직원은 점원 10명, 공장 작업원 10명, 장식 장인 4명 정도. 업무 내용은 1전짜리 동화나 5전짜리 백동화를 매입하여 100엔 단위로 나누어서 상가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교환하는 것이었습니다.후에 지금상으로 진출하여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주지 등에서 매입한 외국 금화를 용해 및 정련하여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배양된 기술이 후에 귀금속의 공업 이용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창업자인 다나까 우메키치 1853년~1936년
1892년

야마자키 가메키치는 젊은 시절에 친척이 경영하는 시미즈상점에 봉공을 한 후 가게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귀금속 장신구나 미술품 제조도매업을 하는 동명의 시미즈상점을 니혼바시 바쿠로초에 개업하였습니다. 후에 도쿄 니혼바시로 이전하여 야마자키상점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이 가게는 시계, 귀금속을 취급하여 이름을 알렸고, 일본에 갓 들어온 다이아몬드도 취급하였습니다. 1926년에는 도쿄 긴자로 이전하여 소매업으로 바꾸었습니다.

1930년, 다나까상점이 야마자키상점의 경영을 계승. 전후에도 오랫동안 긴자야마자키로 영업을 계속하여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현재는 GINZA TANAKA의 긴자 본점이 되었습니다.
야마자키 가메키치 1870년~1944년
귀금속 업계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K24’, ‘K18’과 같은 금의 품위를 나타내는 표기의 제정에도 힘을 썼습니다.
야마자키상점이 제조 및 판매하여 롱셀러가 되었던 샤프 펜슬. 현재의 다나까 귀금속 주얼리 제조품에도 각인되는 ‘호시에스’(별모양 속 S)라는 브랜드 마크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촬영: 이노우에 신이치로
1907년

다나까상점에 인접했던 일본 최초의 전력회사인 도쿄전등(주)(현재의 도쿄전력홀딩스(주))의 전신)으로부터 사용이 끝난 폐전구 처리를 의뢰 받았습니다. 당시의 전구에는 백금(플래티넘)이 사용되어 이것을 용해 및 정련하여 백금 미세선 가공에 성공했습니다.

또한 그 외에도 백금제 이화학용 도가니, 증발접시, 전극, 주걱 등도 제조하였습니다. 이것을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개최된 도쿄권업박람회에 출품하여 표창을 받았습니다.

도쿄권업박람회에 출품된 다나까상점의 백금 제품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군수제품 제조에도 백금은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화약제조 원료인 염소산칼륨을 제조하기 위한 장치에 대형 백금전극판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백금의 수요가 증가하였습니다. 다나까상점은 이러한 제조회사에게도 백금을 납품하였습니다.

또한 백금은 전쟁에 사용되는 주사바늘의 소재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백금 수입이 감소하여 대체 소재로서 니켈을 사용한 주사바늘을 육군 위생 재료창의 지도하에 완성. 대량으로 제조 및 판매하였습니다.

이렇게 백금을 주력으로 취급하게 된 다나까상점은 주식회사가 된(1918년) 후에 게재했던 신문광고나 보자기, 명함에는 ‘백금, 금, 은’과 같이 백금을 먼저 강조하였습니다.
다나까상점 시절의 보자기(왼쪽)와 다나까 우메키치가 사용했던 명함(오른쪽). ‘백금, 금, 은’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1918년
다나까상점을 주식회사로 조직 변경
1923년

이 시기에는 세계의 백금 산출량의 70%를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나까상점의 2대 사장인 다나까 이치로는 러시아와 백금 수입 교섭을 개시합니다. 그 사이 러시아 혁명이 진행되어 소련이 성립하였습니다. 그리고 1923년, 소련 정부와 판매 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다나까상점이 백금과 팔라듐의 일본 총대리점이 되고 동양에 대한 판매권을 떠맡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소련 정부로부터 러시아 황제의 전속 화가였던 O. 비취코프의 유화 ‘농민의 딸’이 증정되었습니다. 원래 크렘린 궁전에 장식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련 정부로부터 증정된 유화 ‘농민의 딸’
1930년

백금 미세선의 국산화에 성공한 후, 이를 사용하여 망을 짜는 기술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백금 가공은 금이나 은보다 어렵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키네라는 기사를 초빙하여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최초의 촉매용 백금망 제조에 성공했습니다. 이 연구를 응용하여 백금 이리듐선 개발에도 성공. 이후 금 극세선 제조 기술에 활용되어 본딩 와이어 제조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다나까귀금속의 방향성을 형성한 촉매용 백금망(사진은 전후)
1934년
중국, 조선으로부터 은화를 매입, 용해하여 영국 존슨 매티사에 수출
1936년

일본 정부는 전쟁에 대비한 자원 확보를 위해 다나까상점을 비롯한 귀금속 업체를 압박하여 백금 체인이나 반지 등을 제조시켰습니다. 백금이라는 소재의 중요성을 PR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백금장이나 국방반지(간사이에서는 호국반지)가 제조 판매되었습니다. 비상 시에는 이를 정부가 구입하여 자원 조달을 실시한다는 민간 비축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백금의 민간 비축을 목적으로 제조된 백금장(사진은 전후의 복각판)
1943년
사명을 ‘다나까귀금속공업 주식회사’로 변경
1945년

종전의 해 가을, 갑자기 미군의 전차와 장갑차가 다나까귀금속공업 본사를 포위하고 총을 가진 군인이 사옥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금고를 열게 하여 보관되어 있던 귀금속류를 모두 몰수해 갔습니다. GHQ(연합군총사령부)의 지시였습니다. 몰수한 귀금속류는 일본은행 지하실에 수장되었습니다. 다나까귀금속공업에서는 제품을 만들 수도 없어 한동안 업무를 할 수 없습니다.

연합군총사령부가 귀금속 몰수. 다나까귀금속공업 직원도 이 작업에 동원되었습니다.
GHQ에 몰수되었던 귀금속류가 모두 돌아온 것은 1959년의 일이었습니다.

1946-1968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기


전후의 부흥을 거쳐 고도 경제 성장한 원동력은 공업 기술의 발전이었습니다. 다나까귀금속도 최신 기술을 채용하여 제조 개발에 노력하여 크게 성장해 왔습니다.
1948년
후생성으로부터 치과용 귀금속 제조 및 판매의 지정을 받음
1949년

전후 급격히 진전된 섬유산업. 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그 해 효고현 가와니시시의 제휴공장에서 화학섬유용 노즐 제조를 개시했습니다. 처음에는 노즐의 구멍 뚫는 기술이 원시적이어서 철 받침대 위에 올려 놓은 두꺼운 종이를 돌리면서 구멍을 뚫는 작업 방법이었습니다.
전후 초기의 노즐 제작에서 구멍 뚫기를 실시하고 있는 공정
1952년
대장성으로부터 ‘금판매업체’로 지정됨
1955년

GHQ가 맡은 일본의 부흥정책의 하나로 전신전화망의 정비가 있었습니다. 특히 전화회선을 자동으로 연결하는 자동 교환기의 채용이 진행되어 거기에 사용되는 접점 제조를 다나까귀금속공업이 맡은 것입니다.

접점에 사용되는 원료 중 하나인 팔라듐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과 수입 교섭을 실시했습니다. 다나까귀금속공업은 전쟁 전의 백금 수입의 연결고리도 있어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크로스바 접점(Micro profiles)은 주로 히라쓰카 공장에서 제조했습니다.
1961년

아직 반도체 산업이 여명기였던 시절. 그 제조에 사용되는 본딩 와이어의 제조를 위해 다나까귀금속공업과 미쓰이 금속 광업의 합작회사로 다나까전자공업 주식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라는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기술력 향상에 노력하며 치열한 경쟁에 직면해 갔습니다.
1963년 도쿄 미타카시에 완성된 다나까전자공업 주식회사의 미타카 공장
1963년

고도 경제 성장을 계속한 일본의 염원 중 하나가 ‘도쿄 올림픽 개최’였습니다. 그리고 1964년의 개최가 결정. 이에 따라 도쿄 올림픽 기념 메달 협회가 발족하였고, 기념 메달의 발행 및 판매도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나까귀금속공업 사장인 다나까 준이치로가 이 재단의 이사장에 취임하여 귀금속 업계를 총동원한 사업이 되었습니다. 메달 디자인은 올림픽 엠블럼과 포스터 등을 디자인한 가메쿠라 유사쿠 씨에게 의뢰. 타각을 대장성 조폐국이 실시했습니다.

메달은 금, 은, 동이 제조되었고 1964년 4월 17일에 발매. 당일은 매장에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왼쪽부터 은메달, 금메달, 동메달. 1967년에 개최된 유니버시아드 도쿄대회 기념 메달도 제조, 판매되었습니다.
1964년

IC 등 전자산업 분야의 활성화에 따라 그 제조에 필수적인 금 본딩 와이어(금속의 극세선)의 수요도 높아졌습니다. 통산성으로부터 다나까귀금속공업에 직경 10미크론(마이크로미터)의 본딩 와이어를 개발하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직경 10미크론의 플래티넘 선의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금의 극세선은 25미크론이 가장 가는 제품이었습니다. 반도체 메이커에도 지도를 요청하여 마침내 완성시킨 것이 이 해입니다. 본딩 와이어는 현재도 다나까귀금속의 주력 상품 중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모두 수입품이었던 본딩 와이어를 국산화
1965년

1960년대, 전자기기의 접점에는 귀금속 도금이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나까귀금속공업은 미국에 본사를 둔 셀렉스사와 합작으로 일본 일렉트로플레이팅 엔지니어스(약칭: EEJA)를 설립.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 공장에서 조업을 개시했습니다. EEJA에서 도금액 및 도금 장치를 제조하고, 다나까귀금속공업이 판매를 담당했습니다. 이 합작사업은 다나까귀금속이 전자 업계에서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입니다.
EEJA 설립 당시의 사옥 외관

1969-1990년

더욱 진화한 하이테크 시대


컴퓨터 산업의 융성을 맞아 다양한 첨단 기술 제품에 사용되는 귀금속 제품을 제공해 왔습니다. 또한 자유화에 의해 금이 일반화되어 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그 계몽 활동도 실시했습니다.
1969년
영국의 존슨 매티사와 합병회사인 다나까 매티(주) 설립 만국박람회 기념 메달 제조
1970년
다나까귀금속판매 주식회사 설립
1974년
희성금속(주)을 한국에 설립
1978년

1973년, 일본 정부는 금 수입자유화를 단행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내에서 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또한 1978년에는 수출도 인정되어 금이 완전 자유화되었습니다. 같은 해 다나까귀금속공업은 세계 금 시장에서 가장 권위 있는 런던 금 시장에 자사에서 용해 및 정제한 순금 바를 보내 일본에서 처음으로 공인 용해 및 검정업체로 인증을 받았습니다. 이 인증은 일반 고객의 신용과 신뢰를 얻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다나까귀금속공업에서 용해 및 정제한 순금 1킬로그램 바
1979년

197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금 유행에 편승한 악덕업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한 통산성이나 국회에서 다나까귀금속공업에게 조치를 강구하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금지금 특약점 개발 프로젝트’를 발족했습니다. 전국을 100개 이상의 상권으로 나누어 그 상권에서 최고 상점이 ‘특약점’이 되어 다나까귀금속 매장과 동일한 상품 및 서비스를 제공해 갈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였습니다.
다나까 일렉트로닉스 싱가포르 설립
1980년

금은 1978년의 완전 자유화로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재산 형성에 활용하기 위해 금 정액 구입 시스템이 고안되었습니다. 일정 금액으로 금을 구입하는 것으로, 고객을 대신하여 다나까귀금속공업이 매일 일정액의 자금으로 금을 구입합니다. 금 가격이 싼 날에는 많이, 비싼 날에는 적게 사는 ‘달러 코스트 평균법’입니다. 평균 가격으로 구입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1984년에는 플래티넘 정액 구입 시스템도 개시되었습니다.‘꾸준히 저축’이라는 자산 형성 및 자산 보전 수단으로 그룹을 대표하는 상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정액 구입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제작된 각종 팜플렛
SMM用素材量産化技術完成
1985년

이 해, 1885년에 에지마야다나까상점 창업 100년을 맞이했습니다. 당시의 사장인 다나까 준이치로는 평범한 기념 행사가 아니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생각하여 귀금속의 공업적 가치에 대한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집필자는 다나까귀금속 기술자 외에 일본의 주요 귀금속 연구원에 의뢰. ‘서론편’, ‘기초편’, ‘응용편’의 3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기념비일 뿐만 아니라 다나까귀금속의 기술 존중이라는 기업 문화를 재확인하는 기능도 있었습니다.또한 2001년에는 ‘응용편’의 개정판도 발행되었습니다.
1986년
대만 다나까귀금속공업(주) 유한공사 설립
1988년
일본 알파메탈즈 주식회사 설립
1990년

‘긴자야마자키’로 전쟁 전부터 사랑을 받아 왔던 (주)야마자키는 귀금속 주얼리 업계 중에서 독자적인 존재감을 유지해 왔습니다. ‘확실한 품질과 적정 가격’이라는 표어를 토대로 상품을 개발. 매장 여직원에게 판매 가격 설정을 맡기는 등의 개혁도 실시했습니다. 회사명을 다나까 귀금속 주얼리 주식회사로 변경함으로써 더욱 안정감과 신뢰감 조성을 도모했습니다.
(왼쪽) 현재의 GINZA TANAKA 긴자 본점. (오른쪽) 현 점포 외관 이미지의 뿌리가 되었던 1920년 준공된 야마자키 빌딩.

1991년-현재

다양화의 미래를 내다보고


귀금속의 활용 분야는 더욱 넓어졌으며, 이에 따라 다나까귀금속 제품도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해외 거점도 증가하고 글로벌로 제품과 기술을 제공해 가는 체제를 확충하고 있습니다. 변함없는 신뢰와 신용으로 앞으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1991년
주식회사 닛폰 피지엠 설립
1994년
다나까 일렉트로닉스 말레이시아 설립
1996년
다나까귀금속 인터내셔널 주식회사 설립
2001년
다나까전자(항저우) 유한공사 설립
2002년
다나까 귀금속 주얼리(주), 점포명을 ‘GINZA TANAKA’로 변경
2003년

런던 금 시장의 등록인증기관 LBMA(런던 금 시장 협회)로부터 금과 은의 ‘공인심사회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세계에서는 5개 사, 일본에서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1978년에 다나까귀금속공업은 공인 용해 및 검정업체로 인증을 받았습니다. 그 후 세계의 금 시장의 확대에 따라 LBMA는 회원을 영국 이외의 기업에게도 넓혔습니다. 그리고 다나까귀금속공업의 실적이 평가되어 공인심사회사 임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왼쪽) LBMA 공인심사회사의 마크. (오른쪽) LBMA로부터 수여된 공인심사회사 인증서.
2006년

다나까귀금속공업은 1885년 창업 이래 본사 소재지였던 도쿄 가야바초에서 도쿄 마루노우치로 이전했습니다. 본사 기능을 보다 편의성이 높은 장소로 이전함으로써 더 빠르고 국제적인 대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다나까 선단기술재료(쑤저우) 유한공사 설립
2008년
티씨 캐탈리스트 주식회사 설립
2009년

‘도시 광산’이라는 말로 표현하듯이 집에 쌓아 둔 금이나 플래티넘을 회수하여 재활용함으로써 새로 채굴하는 것보다 효율적으로 이를 회수할 수 있습니다. 다나까귀금속은 고객이 금, 플래티넘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귀금속 주얼리를 매장에 가져오면 전용으로 개발된 형광 X선 검사장치로 품위를 판정하여 매입하는 귀금속 주얼리 매수 서비스 ‘RE:TANAKA(리다나까)’를 개시했습니다.

2014년부터는 은 매수도 개시했습니다.
RE:TANAKA 등록점 매장에 걸려 있는 로고 마크

플래티넘과 팔라듐의 적성 거래를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런던 플래티넘 팔라듐 시장(LPPM)입니다. LPPM이 임명한 공인심사회사는 다나까귀금속공업을 포함하여 현재 세계에서 5개 사. 높은 수준의 분석력과 심사 능력, 그리고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와 실적이 LPPM으로부터 인정 받았습니다.
(왼쪽) LPPM 마크. (오른쪽) LPPM이 수여한 공인심사회사의 인증서.
2010년

이 해, 다나까귀금속은 지주회사 ‘TANAKA 홀딩스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지주제로 이행했습니다. 이는 그룹 전체의 의사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사업의 유연성을 더 높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2011년
CDGM TANAKA ENVIRONMENTAL CATLYST Co., Ltd. 설립
2012년

런던귀금속시장협회(LBMA)로부터 다나까귀금속공업이 정회원으로 인증되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에서는 처음입니다. 이 인증을 통해 LBMA가 개최하는 총회 등에서 논의되는 의제에 대한 의결권을 가지는 것 외에 위원회 및 소위원회로 위원 파견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아시아에서 금과 은 시장의 정비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객에게는 더욱 신뢰와 안심을 제공할 수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2015년에는 런던 플래티넘 팔라듐 시장(LPPM)의 정회원으로도 인증 받았습니다.
OKI 다나까 서킷 설립
2013년
CHENGDU GUANGMING PAITE PRECIOUS METAL Co., Ltd. 설립
2015년
다나까귀금속 창업 130주년
일반사단법인 다나까귀금속 재단 발족
런던 플래티넘 팔라듐 마켓의 정회원으로 인증
EEJA (Shanghai) Co.Ltd. 설립
TANAKA America Inc. 설립
다나까 선단 유색금속재료(닝보) 유한공사 설립
2016년

오스트리아 조폐국이 발행하는 빈 금화 하모니는 다나까귀금속공업이 일본의 총대리점이 되어 많은 고객에게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해 4월, 플래티넘 빈 코인 하모니가 새롭게 판매 개시되었습니다. 빈 금화 하모니와 같이 표면에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본거지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뒷면에는 빈 호른이나 하프 등의 관현악기가 부조되어 있습니다.
Metalor Technologies International SA가 그룹 기업으로 참여
2017년
다나까 첨단 유색 금속 재료(청두) 유한 공사 설립
2018년
EEJA의 주식 50%를 보유한 Alent Holdings B.V.사로부터 EEJA의 모든 주식을 다나까귀금속공업 주식회사가 취득. 이에 따라 EEJA는 다나까귀금속공업의 자회사가 됨.
2019년
다나까귀금속(인도) 주식회사 설립
2020년
다나까 코이치로 대표이사 사장 집행임원으로 취임
2023년
다나까 메탈로 전공재료(쑤저우) 유한공사 설립
2024년
본사를 창업지인 카야바초로 이전